“연약하지만 숭고한”: 하상림의 내적행위와 회화의 수행성
정 연 심
(홍익대학교 교수, 비평 및 기획)
40대에 나는 꽃을 이야기 하며 살았다. 흐드러지게 피기도 하고, 살포시 고개 드는 꽃봉오리. 화려함을 뒤로하고 서서히 낙하하는 많은 모습들을,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생과 소멸에 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지만, 어느덧 나의 시선은 깊 옆에 흔하디 흔한 풀섶. 이름도 알 수 없는 얽히고설킨, 모양새는 제각각이지만 얼추 비슷한 녹색 빛으로 동화된 듯 어우러져 뽐내지도 뒤쳐지지도 않게 무심하게 제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 풀섶에 머무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 중에는 흔치 않은 매우 귀한 것도 있겠으나, 천지에 흩어져 널브러진 하찮은 풀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과 표정만은 무릇 개성과 매력을 한껏 지니고 있다. 한 잎 한 잎의 생김새와 잎맥의 선을 화면에 옮기면서 나는 자연의 생명에 대한 놀라움과 존경을 반복하게 된다. 화면 가득 그들이 선은 넘쳐나고, 결 고운 가느다란 잎맥을 더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펼쳐지는 화려한 드로잉이 되고 만다.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수많은 선의 향연은 어느덧 웅장한 산수화의 장엄마저도 느끼게한다.
하상림, 「연약하지만 숭고한 풀섶을 바라보다」, 2012
I. 꽃에서 출발한 추상화
하상림 작가에 대한 글을 준비하면서 나는 그를 두 번 인터뷰를 했다. 한번은 연희동 작업실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서울 근교의 작업실에서 두 번을 인터뷰했다. 이러한 인터뷰 이후에 접한 하상림이 직접 쓴 위의 글은 그 어떤 평론가들이 쓴 글보다 그의 선 작업을 분명하게 소개해주는 짧은 에세이였다. 간결한 그의 글은 작가가 최근 경험한 심리적 어려움도 잘 반영되어 있었다. 그의 글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풀이나 꽃에 대한 애정은 소소한 주변의 사물에 대한 애정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섬세하고 따뜻한 사랑이며 모든 미미한 것들에 대한 포용력이 담겨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하상림의 화면은 일종의 큰 대지 같기도 하고 뭔가를 담아내는 커다란 용기같기도 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고 담아내며 수렴하는 화면의 특징을 구성한다. 꽃을 담아낸 캔버스는 그의 삶의 흐름을 알려주는 시그널이며, 그 안을 빼곡하게 늘어선 선과 면은 유영하는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이어준다.
우리에게 하상림은 꽃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꽃은 그를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게 만든 모티프이다. 꽃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점차 이름 없는 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거의 5년 만에 전시하는 그의 개인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상림은 한번도 전시의 제목을 그럴 듯한 타이틀로 붙여주거나 그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어조의 제목을 붙인 적이 없다. 또한 초기와 달리 최근에 제작된 대부분의 작품은 <무제>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전에는 심플하게 ‘하상림’전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는 오로지 개별 작업을 통해 자신의 회화적 세계를 제시하는데, 하상림의 작업 전체에서 ‘선’은 가장 중요한 형태적 언어로 존재한다. 그에게 선은 단순한 그림 그리기의 스타일이 아니다. 선을 통해 회화의 존재론과 자율성을 외쳤던 그러한 평면 작업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신체를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마치 무엇인가를 읊조리는 행위적 수행성을 반복한다. 작품 안에 표현된 개개 잎들은 가늘기 짝이 없으나 그것들은 하나씩 모여 한없이 강한 윤곽선을 구성한다. 멀리서 보면 어떤 여성이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텍스타일처럼 밀도있는 노동력을 느낄 수 있다. 하상림의 꽃은 연약하지만 강하고 쓰러질 것 같으나 숭고한 감정을 구축한다. 이것들은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재현해주는 꽃이자 숲이며 자연물이다.
II. 선 회화에 담긴 내적 행위, 개인적 행위
2017년 10월에 ‘소울아트스페이스’에서 첫 선을 보이는 하상림의 신작들은 1990년대나 2000년대의 작업과는 상당히 다른 궤적을 보여주는 회화들이다. 2012년의 개인전 이후 그는 오랫동안 작업을 공개하지 못했다. 하상림은 우리에게 ‘꽃’그림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는 화풍에 있어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가 1980년대 중반 독일의 쾰른으로 유학을 갔을 때 그가 접한 것은 독일신표현주의 회화였을 것이다. 당시 국내 화단은 단색화와 민중미술로 양분화된 시절이었기 때문에 하상림이 독일에서 접했던 회화는 자신의 화풍을 새롭게 다지는데 중요한 ‘매개’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그의 작업이 선적이고 회화적이며, 꽃이라는 구체화된 사물을 다루면서도 일견 추상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상림의 초기 작업을 꼼꼼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하상림은 1990년대 초반에는 하늘에서 내려다 본 자연의 모습을 표현적인 색채를 통해 묵직하게 재현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당시에는 <대지>(1995), <바람노래>(1991) 등 자연에 모티프를 두고 물감의 물성을 표현적으로 사용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후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무채색의 선적 회화(linear painting)를 제작하였으며, 이후 조금 더 활기를 띠면서 2010년에는《New Painting》으로 변화해나간다. 하상림은 본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 미술대학 대학원에서 회화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던 작가는 홍대에서 오늘날 단색화를 대표하는 선생님들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추상’은 자연의 대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근본적인 것을 수렴해서 형식적으로 가장 단순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모든 것들은 가장 기본적인 구조만을 남기고 부수적인 모든 것은 제거하거나 소멸되어야 한다. 그는 단색화 스승들에게 대상의 ‘근원성’을 남기는 방법, 이를 통해 회화를 철학, 화론으로 개념적으로 접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회화 자체를 살펴보자면, 그에게 단색화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스승에게서 배운 ‘추상으로 생각하는 방식’의 화론이 남아있다. 눈으로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방식이 아니라, 대상에 자신의 정신을 투영시켜 이를 화면 위에 ‘번역’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전사’하는 방식을 작가는 체득한 것이다.
하상림의 화론과 단색조 회화의 화론 사이를 서로 연결해주는 것은 ‘수행성’이라는 개념이다. 수행성은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작품과 작가가 하나가 되면서 느끼게 되는 몰입성이기도 하다. 윤곽선과 드로잉을 강조하는 하상림의 작업에는 모티프의 반복성을 통한 화가의 몸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수행성’이 자리 잡는다. 즉,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구체적 대상을 그리는 행위에서 출발하지만,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림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지 몸과 그림은 상보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회화의 평면에 누적, 축적되는 선들은 작가의 손길이 모두 거쳐 간 심리성을 반영한 선들이다. 그가 그동안 느꼈던 신체의 불편함, 그로인한 마음의 불편함은 모두 그림을 그리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평온과 위안을 얻게 된다.
또한 하상림과 단색화 회화를 연결해주는 또 다른 일면은 ‘반복성’의 어법일 것이다. 한 세대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제 1세대 단색화 화가들과 하상림의 작업을 연결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을 수 있으나 작가가 ‘꽃’을 통해 사유하고 명상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운 것은 추상화를 제작한 단색화 화가들의 작업방식과도 유사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차적 정물의 세계도 풍경의 세계도 아닌 개념적 산수화의 세계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상림의 꽃그림은 정물화라고 부를 수 없다.
하상림의 풀잎 작업, 꽃 작업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작가가 면밀하게 관찰한 작업 과정을 거친다. 그에게 카메라는 화가의 ‘눈’으로 확장된 감각의 근원이다. 이러한 여정으로 인해 그의 사진은 사진 자체로도 주목을 받았다. 작가는 처음에는 구체적인 꽃과 일상 속의 꽃으로 출발하지만, 점차 그는 꽃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꽃 안에서 슬픔을 이기고 좌절을 느끼다 보면, 결국 화면 속의 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물,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꽃이 아니다. 그 꽃은 작가의 삶을 지탱해주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상징물이자 아이콘으로서의 ‘꽃’으로 여겨진다. 즉, 꽃에는 생각이 담겨있고 작가의 내면과 다양한 색깔의 감성이 절제되고 통제되며, 한없이 표출되다가 다시 경계선 안으로 담겨지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하상림의 꽃들은 작가 스스로의 ‘내면의 행위(inner acts),’ 그리고 개인적 행위(private/individual acts)가 겹겹이 축적되어 있는 화면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극히 개인적이고 때로는 내면을 반영한 마음의 빛깔이 하상림의 평면 회화 속에 담겨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제1세대 한국 비평가였던 이일은 1991년 하상림의 작업에 대해 "내밀한 일상의 세계이자 화가 자신의 내면적 이미지 또는 상상의 세계"라고 하지 않았을까.
III. 찰나와 겁의 시간성
하상림 작업은 꽃이나 선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화두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특정주제를 담은 소재를 포함한 구체적 이야기라기보다는 일상성을 포괄하는 살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꽃이 지고 피는 과정은 인생이 담겨있어 서구 정물화 전통에서는 ‘바니타스(vanitas)’의 상징으로 읽혔다. 하상림의 꽃 작업에서 이러한 삶의 허무가 직접적인 알레고리로 읽히기 보다는,불교 철학과 연관하여 ‘찰나’와 ‘억겁’의 시간성이 평면성이 강한 하상림의 선 작업에서 드러난다. 그의 작업에서 선은 서로 얽혀있기도 하지만, 중첩되어 있고 서로 어긋나면서 평행을 이룬다. 미세한 선의 세계는 마치 현미경을 보고 세밀한 선의 움직임과 그 잔상을 느끼게 할 정도로 관람자의 눈에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클로즈업 렌즈를 통해 마이크로한 자연의 세계를 관찰하고 이를 사진으로 찍고 이를 다시 컴퓨터에서 작업하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이것은 마이크로 세계와 대형 스케일로 확대되는 거시 세계로 표현된다.
하상림의 회화 작업은 작은 크기의 타블로에서 대형 스케일의 설치적 요소까지 동반함으로써, 관람자는 물리적인 시간성을 경험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을 완벽한 추상이라 말할 수도, 또한 꽃이나 풀속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구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이유들은 이러한 작업과정에 기인한다. 그러한 모호성, 혹은 양가성은 동양적인 ‘선’ 혹은 세필화에 바탕을 둔 모뉴멘털한 산수화를 구성한다. 예를 들면,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중 <UNTITLED- PM1714> (80x240cm Acrylic on Canvas 2017), <UNTITLED- WS1717> (80x240cm Acrylic on Canvas 2017)은 마이크로한 자연세계를 클로즈업 시킨 풍경화이다. 특히 이런 작업에서 화가의 시선은 단순히 자연을 눈높이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풀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꽃잎 위에서 속에서, 혹은 아래에서 위로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자/작가의 몸을 움직이면서 나오는 앵글에 바탕을 둔다. 전통적으로 화가의 몸은 한 시점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이러한 모뉴멘털한 풍경화의 세계에서 모티프는 작가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앵글과 시점을 각인시켜 준다.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꽃잎이 지고 피는,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는 과정을 카메라로 포착하며 움직이고 있다.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그러니까, 유사한 모티프지만, 같지 않는 색채의 대비와 선의 흐름, 선의 굵기 등을 실험한다.
하상림의 선은 작가가 붓으로 빈 공간을 100프로 채워나가는 방식은 아니다. 즉, 작품에 따라 빈 공간 위에 작가가 선을 그려 넣어 구성된 선도 있는가 하면, 선은 음각의 흐름을 따라 평면 아래에 놓이기도 한다. 멀리서 육안으로는 색면 위에 선이 그려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가까이서 보면 선과 면은 서로 고정된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기대와 달리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경우도 많다.
꽃은 감각적이고 화려하다. 그러한 감각적인 특징 때문에, 하상림의 꽃에는 시간성이 담겨져 있다는 표현은 일견 어렵게 느껴진다. 그의 회화에서 느껴지는 시간성은 ‘찰나’(刹那)의 순간과 ‘억겁(劫)’이다. 불교에서 ‘찰나’는 본래 산스크리트어로 ‘크샤나’에서 나온 것으로 엄청나게 짧은 순간을 말한다. 육안으로 포착한 순간성이 가장자리가 크로핑 되거나 우연성을 강조한 회화적 구도 안에서 감지된다. 불교의 시간성에서 ‘억겁’은 우리의 물리적 시간성으로는 상정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이야기하는데, 하상림 작가의 선은 바로 이렇게 찰나가 겹겹이 쌓여나간 긴 시간성을 구성하고 있다. 선은 마치 실타래나 미로처럼 여기저기에서 서로 연결되고 관계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 서로를 의지 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서 있는 선은 없다. 마치 인간과 인간이 맺고 있는 인연의 끈이나, 사람과 사물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관계성을 보여주듯이 씨실과 날실은 서로 기대어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필자가 연희동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하상림의 작업은 일부 완성된 회화도 있었지만, 밑그림의 과정을 보여주는 페인팅이 제작 중에 있었다. 우리의 불교 미술 전통 중에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가 있는데, ‘사경’은 수행하는 사람이 부처의 마음으로 불교의 경전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삼성리움미술관, 국내외의 사찰 등에는 이러한 국보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한결같이 금선, 은선으로 아주 세밀하고 섬세하게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가늘고 섬세한 불화의 선을 보면 이러한 것이 인간의 손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면서 삐틀어짐이 없는 능숙한 선의 물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경변상도>의 선은 공덕을 쌓고자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수행의 과정을 반영했다.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모사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쌓아 나가려던 의지의 발현이었다. 우리 주변의 사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단청' 또한 작가의 장식 충동에 담긴 중요한 참조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참조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란 마음을 비워내고 채워내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특히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중 <UNTITLED-YB1712>(85x180cm, Acrylic on Canvas, 2017), <UNTITLED- BB1709>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17) 에서 볼 수 있듯이, 하상림의 ‘선’은 이러한 조형적 전통을 반영한 선의 결과물이다. 카메라로 찍어 실제적 대상에서 출발한 꽃이나 풀숲은 정교한 선의 흔적과 움직임을 통해 사물의 시간성, 흔적이 반영되어 있다.
IV. "연약하지만 숭고한"
하상림의 작업은 "미니멀 하면서도 맥시멀(minimal and maximal)" 해보인다. 선은 드로잉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인데, 그의 작업에서 선은 가장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지만, 동시에 가장 복잡한 실타래, 미로 형상을 하고 있다. 가장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화면의 깊이가 거리에 따라 달리 보이는 깊이감을 구성한다. 가장 소박한 선이지만 가장 화려해 보이며, 선은 무너질 듯 가냘프게 서 있지만 넘어지지 않고 더욱 번창해 숲을 이룬다. 그 숲은 인간이 들어가기 힘든 경외스러운 자연을 구성한다. 색채는 어떤가. 모노톤의 드로잉 같으면서도 가장 화려하고 장엄해보이며, 때로는 보색과 파스텔 톤의 색채들이 선을 뚫고 돌연 튀어나올 것 같다. 미세한 선들이 갑자기 파워풀한 자연경관을 만들어 작가가 말한 대로 "연약하지만 숭고한" 산수화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1하상림, 「연약하지만 숭고한 풀섶을 바라보다」, 『미술세계』, 2012, 10월호, pp. 124-125.
2유재길, 「꽃의 형태론: 영혼을 위한 변주곡」, (서울: 2005); 이선영, 「자연의 선을 뽑아 축조한 세계」, 『퍼블릭 아트』, 2012년 6월호 참조.
3《하상림》, (서울: 갤러리2에디션, 2015).
4《사경변상도의 세계 : 부처 그리고 마음》, 전시도록,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2007).